두껍지도 않은 오래된 고전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정제되지 않은 상태의
그냥 생각나는대로 두서없이 읽은 감정 그대로를 적어본다.
참고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고전을 잃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약 80%
고전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10%
잘 쓴 글, 훌륭한 문학 작품의 대표작이 가진 그 힘이 무언지 깨닫고 싶은 생각이 약 10% 정도다.
(이건 내가 원한다고 알아지는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비중을 낮게 잡았다.)
그리고,
다 읽은 시점에서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자문해 보자면
의무감은 많이 줄었다. 그래도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두 세번 더.
시지프의 신화를 읽은 후 다시 읽으려고 한다.
고전 이해는 목표 수치인 10% 보다 조금 높여서 20% 정도 된 것 같고
좋은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20%~30%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얻은게 많은 느낌이다. 역시 고전인건가...
첫날은 열 페이지 정도를 보고,
이틑날에 또 두 세 페이지를 보고
그리고 어제 새벽 1시반까지 꾸역꾸역 모두 읽었다.
총 146페이지짜리 아주 오래된 조그만 책이다.
남주는 엄마('마망')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건조하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주인공의 성향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저렇게 무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이미 마음속에 다른 의문부터 떠올린 채로 읽기 시작했는데,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다.
아마도 무언가를 생각하기 전에 감정이 북받쳐 가슴이 저린 느낌과 함께 눈물부터 흘러내리게 될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어가서 나는 정말 슬플것인가?
다른 관점으로 만약 내가 죽었을때, 내 아이들이 울기를 바라는가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리고 울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내 죽음을 애도하길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쁘게, 내가 내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만큼 함께 행복한 감정을 느껴주기를 희망한다.
물론 아주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조금쯤 덜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죽음이란 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또 다른 삶을 살 기회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고단한 삶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 것이고
어떠하든 나는 이제야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살 같은걸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지프의 신화는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이방인'에 갇힌 생각만 먼저 할 수 밖에 없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감정은 '답답함'인데
이유는 책에 적혀 있듯 '부조리' 때문이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르게 '행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이야기.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 선고를 받아도 되겠지만
사실 나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 그 죄가 조금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가 사람을 죽였는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는
그래서 그가 앞으로도 또 선량한 보통의 사람을 또 죽일 것인가? 라는 질문에 Yes or No 를 달아보자면
나는 이 작품 속 주인공이 두번째, 세번째 실 수를 할 가능성을 0%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그 대상이 물론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은 누군가(그게 혹, 내 가족이나 지인이 될 수도)가 될 가능성이 아주많이 낮다고 해도 그렇다고 백번 넘게 인정한대도 그 가능성은 0%보다 크다는 쪽이다.
인간은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자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관계로,
작품 속 주인공에게 내려진 벌, 사형선고가 부당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답답함은 아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 참석에 필수적인 시간을 계산한 주인공은
일하던 곳 주인에게 하여 한 후 이틀 휴가를 낸다.
어쩔 수 없지만 흔쾌히가 아니라 조금 못마땅한 주인의 허락을 느끼고.
양로원에 간 주인공은 그곳 관계자들의 기대와 다른 언행을 보임으로써 부정적 인상을 남긴다.
다음 날 여친 마리가 찾아오고, 사랑한다는 감정으로 포장되지 않은 육체가 가진 기본 욕망에 이끌려,
그녀가 이끄는 대로 하루를 보내고 그녀와 잠을 잔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아들이 다른 여자와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면 안되는 건가? 이게 부도독한가? 이런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눈을 의식해서 혹은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신이 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에라도 혹은 내가 상상해 낼 수 없는 다른 이유를 들어서, 그게 양심을 콕콕 찔러서 결국은 며칠 정도 즐거울 수 있어도 즐겁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더 많을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 사이 개를 키우는 노인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 지인 가계
한 여자와 불화를 겪고 있는 주변 남자(레에몽)와의 대화들이 나오는데
주인공을 일관성있게 대부분 무감한 반응을 보이고
부탁하면 들어주고(마리가 결혼하자고 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면 결혼하자고 하고 레에몽이 여친에게 편지 좀 써 달라고 하면 또 써줌)
귀찮거나 불편하면 솔직하게 자기 감정, 생각을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한다.
사실 현실에서 누군가 내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나 또한 그를 이상하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곤 오만가지 상상을 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 잘못한걸까. 그냥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원래 이런 성향의 사람일까.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대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 위험한 사람일까 아니면 솔직해서 무해한 사람일까
그리고 이 사람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을까 어떤 책이나 사람에게 영향을 받았을까, 트라우마가 있는 걸까 등
그는 자기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봐 눈치는 보지만(진짜 눈치보는 행동을 하는게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 정도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배려심으로 포장한 말과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이야기 후반 그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게 되고 사형 선고를 받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러니까 판사의 예심, 변호사와 대화 그리고 사제와의 대화 등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역시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게 아님.
실제 이런 인물이 우리 현실 속에 있을까 싶지만
(가끔 퉁명스러운 누군가 또는 괴팍한 노인들을 본 것 같기는 하다. 아주 드물지는 않았던 것 같음.)
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사형수가 된 주인공의 두려운 감정도 표현되는데
그렇다고 자기가 한 말,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뭐, 해 봐야 소용없기도 하고
그런 '후회'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고전이 좋대서 찾아보면 버전이 너무 여러가지이다.
번역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아서 조금 신중해진다.
(심지어 리뷰를 보면 번역이 엉망이라 집중할 수 없다는 리뷰들이 보이는 책들이 꽤 있다.)
원서 그대로 읽고 이해해 보고 싶지만
그건....., 음...,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흙 속에 묻히게 되는거 아닌가 싶어서 ㅋㅋㅋ
문장체가 마음에 와 닿는 책으로 골라 읽는다.
번역 엉망이라는 리뷰 달린건 거른다.
뭐 그럼에도 대안이 없으면 그냥 읽는다.
이방인,
두껍지 않은 고전이고
지금 우리 현실에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삶과 함께 어디서나 보고 경험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 '부조리'를
볼 수 있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요즘 워낙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지만
가벼운 이야기에 지쳤거나
왜 살아야 하나?
이런 의문이 들 때쯤 한 번 읽어보자.
분명 얻는 게 있을거라 생각된다.
있기를 바래본다.